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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자영 칼럼]국회무용론(150) 이재명과 유시민이 그 나물에 그 밥, 민주를 권력 구조로서 이해하지 못하고, 개인의 의지 및 감정 차원으로 환원

최자영 | 입력 : 2026/08/30 [18:03]

 

이재명과 유시민은 위정자의 가부장적 온정주의가 민주인 줄 알아
함돈균은 비민주적 로마 귀족정치를 건강한 것으로 규정
‘일치’, ‘통합’, ‘갈등 해소’, 화해의 종용은 일체가 비민주적 강요
백낙청이 말하는 ‘반촛불세력 및 당내 반란의 진압’은
소수결 및 임박한 당규 개정의 선호투표제에 의한 것

▲ 최자영 전 부산외국어대 교수  ©


작가 유시민(전 보건복지부 장관, 노무현재단 이사장)이 대통령 이재명에 대해, 한편으로, “1년간 대통령이 보인 모습은 오만한 권력자”, “대통령이 여당 대표(김민석)를 자신이 픽해서 당선시키려 하는 건 왕정, 귀족정으로 가는 것”, 다른 한 편으로,“이 대통령 어록에 있는 것처럼 저(유시민)는 이 대통령을 지지했지 숭배하지 않았다. 스스로 역사의 도구가 된다고 해서 믿었고, 권력이 아니라 권한이 필요해 출마한다고 했기 때문에 전적으로 신뢰했다”, “(그러나) 대통령은 소통, 교감, 공감하는 방식으로 (국정운영을) 하고 있지 않다”등 논평을 했다.(한겨레, 2026.8.26.)

 

유시민은 “스스로 역사의 도구가 된다”, “권력이 아니라 권한이 필요해 출마한다”고 한 이재명의 말을“전적으로 신뢰했다”고 한다. 누가 누구를 믿거나 말거나 하는 것은 있을 수 있는 일이고 또 자유의지에 의한 것이지만, 그것은 제도로서의 민주정치와 무관한 것이다.

 

민주정치란 두 가지 속성을 갖는다. 첫째, 권력이 독주하지 못하도록 그에 대한 견제장치가 있어야 하는 것, 둘째, 그 견제의 궁극적 주체는 모든 권력의 원천인 국민 민중(demos)이어야 한다는 점이다. 민주정치는 민중(demos)이 중심이 되는 민중 정치를 뜻한다.

 

이같이 권력의 상호관계를 규정하는 민주정치의 본질적 속성은 믿거나 말거나 하는 개인의 감정과 무관한 것이다. 유시민이 놓친 것은 ‘믿는 것’에서 그친 점이다. 그 믿었던 대상이 변질하고 권력자로 일탈했을 때, 어떻게 견제해야 하는지에 대한 방법론이 유시민의 사전(事典)에는 없다.

 

필자가 전해 들은바, 기백만 부가 팔렸다고 하는 그의 저서, 『국가란 무엇인가』에도 그런 방법론이 나오지 않는다. 그의 정치 무대에서는 위정자가 중심이 되고, 국민 민중은 위정자가 베푸는 정치의 결실을 향유하는 수동적 존재로 등장한다. 유시민의 정치관은 가부장적 ‘온정주의’에 머물러 있고, 필자가 이해하는 바에 따르면, 국민 민중이 주체가 되어 위정자를 견제하는 민주정치적 장치를 설정하고 있지 않다.

 

이재명은 비민주적, 가부장적 ‘온정주의’에서 유시민을 닮았다. 이재명은 이미, 한편으로, “정치인을 믿지 마라. 숭배하지 마라, 정치인은 도구다”라고 하고, 다른 한편으로, “정치는 결국 국민이 하는 것”이라는 말을 한 것으로 회자한다. 여기서 놓친 것은, “도구인 정치인이 도구이기를 거부하고 독주하기 시작하고, 민중이 그 정치인을 믿지 않게 되었을 때” 어떻게 해야 하는 것인지에 대한 방법론이 없다는 점이다. 즉, “정치는 결국 국민이 하는 것”이라고 했으나, 어떻게 국민이 정치의 주체가 되는지 하는 제도적 장치가 구체화되어 있지 않다는 것이다. 이재명의 발언은 아주 그럴듯해 보이지만, 이미 즉시성, 현실성 없는 구호에 불과한 것이었다.

 

그 비현실성은 유시민이 하는 기원에서 드러난다. 이 시점에서, 그나마 이재명이 여론에 관심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니, 거기에 기대를 건다는 희망을 피력한 것이 그러하다. 여기서 주인은 국민이 아니라 이재명이다. 여론에 신경을 써서 행여 마음을 돌리는 주체도, 또 그렇지 않을 수도 있는 주체도 이재명이다. 국민이 할 수 있는 것은 여론을 형성하는 것뿐이고, 그것은 국민이 정치에 직접 발언권을 행사할 수가 없는 현실을 방증한다. 국민은 주인이 아니라 들러리로 남아 있는 것이다.

 

더 큰 문제는, 이른바 민주정치를 표방하는 한국에서, 국민 민중이 들러리 서게 하는 것은 위정자, 민중을 가리지 않고 보편적으로 퍼져있는 정서라는 데 있다. [정읽녀(정치 읽어 주는 여자)](유튜브)는, 유시민을 인용하고 그 같은 맥락에서, “권력자가 ‘혹시 내가 틀렸을 수도 있는가?’라는 질문을 할 수 있을 때 민주주의는 아직 살아 있다”, “이 질문이 사라지는 순간, 국민의 비판은 충고가 아니라 공격이 되고, 다른 이견은 조언이 아니라 배신이 되고, 마지막에는 박수만 남는다. 박수만 남은 권력은 강하게 보일지 모르지만 현실을 확인할 방법을 잃어버린 가장 약한 권력일지도 모른다”고 논평했다.([정읽녀], https://youtu.be/B_VHP3qdAik?si=79hNEfhOi5CHS5Zi)

 

[정읽녀]도 ‘권력자’를 말하고, ‘권력자가 스스로 질문하는 것’을 민주주의로 규정했다. 그러나 그런 것이 아니다. 권력자가 스스로 질문하기를 기다리는 것은 민주주의가 아니라 독재이다. 민주주의의 특징은 두 가지이다. 첫째, 아무도 배타적 권력자가 되어서는 안 되는 것이다. 권력은 입법과 행정으로 분립되어 있고, 서로 견제해야 하기 때문이다.

 

둘째, 권력자가 스스로 질문하기를 기다리기 전에, 일탈한 권력자는 국민이 서둘러 제거해버려야 하는 것이 국민주권 민주주의이다. 민중이 권력(민중 demos + 권력 cracy)의 주체가 되는 민주주의는 권력자가 스스로 할 때까지 민중이 양해하는 것이 아니다.

 

[정읽녀]는 “정치의 기준은 권력의 언어가 아니라 (정치가가) 시민을 대하는 방식에 있다”고 했다. 여기서도 정치의 주체가 시민이 아니라 정치가로 잘못되어 있다. 그래서 이 말은, “정치의 기준은 시민이 권력자를 견제하고 다스리는 방식에 있다”로 바뀌어야 한다. 시민이 결정권을 가지고 있어야 하는 것. 기준이 시민에게 있지 않은 것은 민주정치가 아니기 때문이다.

 

이번 민주당 당 대표가 된 김민석은 애초에 당·정·청 ‘일치’를 내걸었다. 당(국회), 행정부, 청와대(대통령)를 하나로 통일시키겠다는 것이다. 말을 바꾸면, 국회와 행정부의 분립을 뭉개겠다는 의지를 천명한 것이다. 권력의 분립을 포기하는 것은 민주정치의 장치에 정면으로 역행하겠다는 뜻이다. 이재명도 그 같은 맥락에서, 전당대회가 끝나자마자, 모두 똘똘 뭉쳐야 한다고 주문했다. ‘일치’나 ‘똘똘 뭉쳐야 한다’는 요구는 민주가 아니라, 전체주의, 독재정치의 상징이다. 민주는 자율과 다양성을 전제로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갈등의 지양이나, 화해의 종용도 ‘일치’와 ‘똘똘 뭉치는 것’과 같은 선상에서 비민주적이다. 갈등이나 화해는 정치적으로 강요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권력 관계를 규정하는 민주정치는 개인의 ‘신뢰’ 여부와 무관하듯이, 갈등이나 화해 여부와도 무관하기 때문이다. 민주정치는 갈등을 해소하는 방법이 아니라, 갈등을 전제로 해서 다수결로 결론을 이끌어내는 정치적 장치이다. 길등 자체를 없애고자 하는 것은 개인감정의 영역을 침범하는 월권의 독재이다.

 

민주정치의 깃발을 무색하게 하는 객설(客說)들에 이르면 귀족정치까지도 정당화기에 이르렀다. 교수 함돈균은 귀족(혹은 귀족정치) 자체가 나쁜 것은 아니라고 한다. 함돈균의 이 발언은, “이 대통령 모습은 오만한 권력자 ... 왕정, 귀족정으로 가려는 것”이라는 유시민의 발언에 대한 반론으로 나온 것이다.

 

함돈균에 따르면, “전통사회에도 귀족이 있었다”, “로마에도 귀족을 인정했다. 원로원이 귀족 회의체”, “(로마에서) 올바르고 똑똑한 귀족을 양성하는 것, 그 귀족을 어떻게 건강하게 만드느냐, 이런 것이 엘리트 교육의 중요한 요소 중 하나”, “현대 사회도 마찬가지. 엘리트 자체가 나쁜 게 아니라, 시민을 건강한 엘리트, 능력 있는 엘리트, 부패하고 무능한 엘리트가 아니라 올바르고 공공성을 가진 엘리트를 양성하는 것이 현대교육의 목표”라고 한다.

 

함돈균의 이 같은 발언은 어폐가 있다. 첫째, 과거에 귀족이 있었다던가, 로마가 귀족을 인정한 사실이 귀족의 존재를 정당화하거나 귀족 자체가 나쁜 것이 아니라는 점을 보증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로마의 귀족 공화정은 비민주적이었다. 로마의 귀족으로부터, 함돈균이 말하는 바와 같은, 그런 올바르고, 똑똑하고, 건강하고, 공공성을 가진 존재를 유추해 내는 것은 참으로 사실과 동떨어진 것으로서, 허무맹랑한 논리의 전개이다. 그 로마의 귀족들 가운데 일부가 군국주의에 기초한 침략적 팽창을 통해 로마 제국을 건설한 주체가 되었기 때문이다.

 

로마의 귀족정치를 윤색한 함돈균은 이재명의 독선적 결정의 과정을 민주정치인 것으로 이해했다. 함돈균의 발언 요지를 추리면, 이재명은, “국민을 위하고, 현재를 위하고, 미래를 위한 정치, 그 필요를 구현하고 실현시키는 정치, 그리고 그 필요를 딱 짚으면서 우리가 이런 것이 필요했구나, 또 이런 것은 부족했구나 ... 이런 것들을 각성시키면서 국민의 응원을 받는 정치”를 하는 사람이다.

 

함돈균에게 “딱 짚어내는 것”, “국민들에게 각성”시키는 행위의 주체는 이재명이고, 국민은 그런 이재명을 응원하는 사람이다. 다름 아닌 바로 여기에서 이재명의 결정 과정은 독선적이었음을 인식하는 그의 인식이 드러나고, 그의 인식 속에서 국민은 토의나 결정에 관여하지 못하고 수동적으로 응원하는 존재로 규정되고 있다. 함돈균의 이 같은 논의에 치명적인 함정은, “딱 짚어내는” 이재명의 결정이 잘못되었을 경우, 아무런 견제장치가 제도적으로 마련되어 있지 못하다는 점이다. 이른바 모든 권력의 주체라고 일컫는 국민 민중이 응원부대로 전락하여 들러리 서고 있기 때문이다.

 

로마 귀족을 건강한 엘리트로 윤색하고, 이재명의 독선적 걸정을 정당화한 함돈균은 현재 한국 헌법이 규정한 민주정치를 다소간 백안시했다. 민주정치는 국민 민중이 응원부대로 들러리 서는 것이 아니라, 필요한 경우 공권력을 견제하고 결정권을 행사하는 존재가 되어야 하며, 그 필요는 국민 민중이 스스로 결정할 수 있어야 한다는 점을 함돈균은 간과했다. 누군가의 가부장적 온정주의에 의해 지배되는 제도는 민주정치가 아니다.

 

공권력에 대한 국민 민중의 능동적 견제 및 결정권에 대한 몰이해는 유시민, 이재명, [정읽녀], 김민석, 함돈균뿐만 아니라, 정규재(전 한국경제신문 주필), 백낙청(『창작과 비평』 명예편집인) 등의 지론에서도 보인다.

 

정규재는 보수 논객으로 이재명을 좋아한다고 고백했다고 하는데, 그 좋아하는 이유를 약술하면 다음과 같다. “한국 기득권 세력이 이재명에 대해 공포감을 느끼고, 악마처럼 생각하는 이유가, 그가 중학교, 고등학교도 안 나오고, 공장에 다녔고, 배운 것도 없고, 찢어지게 가난한 집에서 자라서, 사회에 대해서 뭔가 비틀린 심정을 가지고 때려 엎어 버리지 않을까 하는 것이다. 그래서 내(정규재)가 이재명 대표에게 물었다. 그 억하심정이 어떻게 없어졌냐고. 이재명 대표가 대답하기를, ‘이제 그런 것 없다. 그냥 내가 넘어가야 되는 강물이고 내가 뛰어넘어야 되는 큰 바위이고, 이렇게 느껴진다’”고 대답을 했다고 한다. 그래서 정규재가, “아 이제 어린아이가 아니구나, 공장 생활을 하던 춥고 가난한, 그 이재명이 아니구나”라고 생각했다는 것이다.

 

정규재가 이재명을 좋아한다든가, 이재명이 지금 어떻게 느끼는가 하는 것은 민주정치의 영역이 아니다. 기호, 생각, 느낌은 개인의 영역이므로, 권력의 사회적 배분에 관련하는 민주정치와 무관한 것이다. 공권력에 대한 국민 민중의 견제 및 결정 권력의 확보는 춥고 가난했던 한 사람이 지금 어떤 가치관을 가지는가와 전혀 무관하게 제도적으로 장치되어야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백낙청은 이번 민주당 전당대회에서 김민석이 거둔 승리를 두고, 촛불 세력이 반(反)촛불세력을 진압한 것, 당내 반란 진압인 것으로 규정했다. 백낙청은 적어도 두 가지 오류를 범했다.

 

첫째, 전당대회에서 승리한 김민석이 촛불 세력이라고 본 백낙청은, 촛불이 마치 김민석이 주창하는 당·정·청 ‘일치’, 혹은 이재명이 말하는 ‘똘똘 뭉치기’를 지향한 것처럼 이해한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사실은 딱히 그런 것이 아니다. 윤석열을 몰아낸 촛불은 오히려 누군가의 명령이나 강요를 지양하고 자율과 다양성을 옹호하기 위한 것으로 이해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둘째, 주지하듯이, 이번 당 대표 선거는, 원내대표 한병도의 주관하에, 먼저 당 최고위원회에서 다수결도 아닌 소수결로 선호투표제가 통과되는 것으로서 이루어졌다. 백낙청이 말하는 그 승리한 촛불 세력은 비민주적 소수결로 필요한 규정을 도모하는 이들이 된다.

 

여기서 법 규정이란 그 자체로서는 크게 쓸모가 없다는 결론이 도출된다. 이번 당 대표 선거에서뿐 아니라 원래 그랬다. 기원전 4세기 말, 그러니까 지금으로부터 약 2,400년 전에 이미 민주정치의 본산, 그리스 아테네에서 그런 점을 밝힌 바 있다. 법은 적혀진 글이라 아무런 힘이 없고, 법에 생명을 불어넣는 것은 결국 사람이다. 언어의 마술사로 알려진 고명한 변론가 데모스테네스의 구절을 소개한다.

 

“여러분 가운데 누가 부당행위 당한다고 소리를 지르면, 법이 달려가서 그를 도우는 것이겠습니까? 아닙니다. 법은 그냥 글로 적혀진 것이라 행동할 수가 없죠. 그렇다면, 그 힘은 어디에 있는 것일까요? 그것은 여러분 스스로에게 있습니다. 법을 필요로 하는 이가 있을 때, 여러분이 법을 지키고, 법이 전능의 권위를 가지도록 함으로써 발생하는 것이니까요. 그래서 법은 여러분에 의해 힘을 갖고, 또 여러분은 법에 의해서 힘을 받습니다. 그러니, 여러분이 스스로를 보호하듯이, 피해 본 이를 보호해야 하는 것이죠. 위법의 부당행위는, 누구에 의해 자행된 것이든, 공동의 현안이며, 공적 기여, 동정, 인맥, 어떤 꼼수 등 그 어떤 사유에 의해서건 양해가 성립되어 위법한 이가 처벌을 면하도록 해서는 안 되는 것이에요.”(Demosthenes, 21.224-225.)

 

이렇듯, 법을 지키고 안 지키는 것은 사람의 손에 달렸다. 법 규정 자체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는 뜻이다. 그래서 민주정치는 법치주의가 아니다. 글자로 적혀진 법이 스스로를 지키는 것이 아니라 사람이 나서서 그것을 지켜야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법의 지배란 환상이고, 그 법은 결국 사람의 손에 의해 변형되고, 그 적용도 고무줄처럼 늘어났다 줄었다 하기 때문이다. 이번 당 대표 선거에서 법 규정은 필요에 따라 소수결로 변형되었고, 그 앞에서 대다수 민주당 의원은 침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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